김영하 - 여행의 이유
"Life is a journey, not a destination"이라는 글귀를 치앙마이 그림 가게에서 본 적이 있다.
인생은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의 여행이라는 것. 심플한 말이다.
처음에 몇년간,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마치 삶이 게임의 퀘스트를 깨듯, 끊임 없이 나의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순간 왔다 한 순간 떠나는 것이라고.
그러니 잠깐에 노여워하지 말고, 상처받지 말고, 그저 너의 길을 마냥 걸어가라는 취지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여행의 이유'를 읽어보면, 약간은 뉘앙스의 차이가 느껴진다. 특히 이주와 여행의 관계는 현실과 소설의 관계와 같다는 비유가 퍽 재미있었다.
오히려 무질서하고, 통제력을 잃어 버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이 그저 떠나야 하는 갑작스러운 이주에 대응하는 것이라면,
재미있는 플롯, 감동적인 와우 포인트, 만남과 이별까지 저자가 그려내는 소설은 흡사 여행자가 만들어나가는 여행과 같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같은 취지에서 노바디와 섬바디를 편의에 따라 선택하는 여행자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선망하고 싶은 공간에서는 노바디가 되어, 구별 짓고 싶은 곳에서는 섬바디가 되어, 결국 여행자는 스스로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했던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무계획 여행을 좋아한다고 주장해온 나였지만, 꼬여있는 하루 일정에는 쉽게 짜증을 내곤 했다.
한 손에는 가이드 북,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무엇을 찍을까 어디를 다닐까 고민하는 것이 내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노바디와 섬바디를 나라에 따라 바꿔가며 행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돌아와서는 나는 그 곳에 여행을 간 것이 아니라, 살러 간 것처럼 포장을 했다. 그게 능숙한 여행자로서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어쩌면 여행이 즐거웠던 이유는 편의에 따라 나 자신을 선택할 수 있고, 처한 환경을 내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가 처해 있는 곳에서 노바디가 될지 섬바디가 될지, 그곳에서 소중하고 빛나는 풍경들은 어떻게 찾아나갈지 스스로 선택을 반복하는 것 역시 여행자의 몫이다.
같은 공간을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여행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다른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인생이 여행과 같다면, 결국 그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여행자 스스로인 것 같다.
나는 지금 이 삶에서 어떤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목적지만 정해놓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스팟들만 쫓아다니는 숨막히는 여행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가지 더, 낯선 곳에서 우리는 약해진다. 그곳에서 나를 세우는 것은 경계와 습격이 능사는 아닐것 같다.
환대와 신뢰, 지금 여기에서 함께 여행하는 이들에 대한 여행자로서의 상호 존중이 있다면, 삶은 더 재미있어질 것 같다.
우연히 만난 여행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낯선 곳을 거닐 때 서로가 서로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남기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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