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미디어

Triangulation

SGSN 2022. 8. 12. 17:51

여러 시사프로그램은 사후적으로 챙겨보려고 하는데, 오늘 이 기획을 보면서, 작지만 내게 인사이트를 주는 영역이 퍽 참신한 것 같아 잊을까 하여 아무 말이나 막 쓰고 일단 공유 한다(이 프로그램, 이 기획의 완결성에 대한 관점은 완전히 별개로 한다.  그저 문득 밤에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쓰기 위한 글감 정도라고 생각해주길.).  


국내 이슈에 대해서는 보수-진보 내지 찬성-반대와 같이 양 관점을 고루 제시하는 틀은 많이 나와 있는데, 사실 해외 이슈에 대해 양 관점을 나누어 제시하는 국내 방송은 드문 것 같다.  외국 이슈에 대한 관점이 특정한 주류 외신이나 국내 언론사들의 관점에 취사선택 되는 경우들이 많은데, 어제 KBS 더 라이브에서 트럼프의 코로나-19 대책을 놓고 트럼프 찬성 측과 반대 측 토론을 붙였는데 매우 재미있었다.  

 


비록 이들은 전문가들도 아니고, 일반인의 관점에서 토론을 하는 것인지라, 예능에 가까운 토론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다만, 글로벌 이슈에 대해서 국내 언론 소비자들이 '관점'이라는 것을 가지고 판단할 논거 조차 찾기 어렵고, 찬반을 함께 견주어 보기가 어렵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시도는 참고해봄직 하다.  '한국어 잘하는' '전문가'를 찾아 토론을 시키는 것이 어려울 수는 있겠으나, 최소한 양 관점을 부딪혀 드러나게 하는 재미나 가치는 상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기사를 쓸 때, 기본 중의 기본은 삼각취재(Triangulation)다.  모든 기사를 다룰 때, 예외 없이 상대방의 입장, 반대 입장을 반영해야 하며, 한쪽의 말에 의존해서 기사를 쓰는 것은 절대 지양해야 한다는 취지다(보도자료 복붙, 검증 되지 않은 말 전달에만 집중하는 등 고질적인 문제는 언젠가 한번 쓰고 싶은 주제인데, 꾹 참고 넘어간다).  물론 무색투명한 객관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진실을 가리는 허위가 될 수 있다는 점에도 완전히 공감하지만, 생각과 생각을 겨루고, 그 겨룬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진실을 드러나기 마련이다.  


[법률가 친구들이 많으니 덧붙이자면, 원/피고가 양자간에 법정에서 상호간 공격방어방법을 가지고 치열한 변론을 벌이더라도, 청구원인, 항변, 재항변, 재재항변을 거치다보면 결국 진실은 하나로 수렴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현실은 요건사실처럼 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논리적인 영역이 아니며, 이 모든 과정은 트레이닝을 마친 법관이 아니라 대중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일테니.]


물론 뉴스라는 것이 사실의 나열로 그쳐서는 안되겠으나, 생각과 표현이 부딪힐 수 있는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로벌 이슈를 보는 시각도 달라서는 안 된다.  외신을 그대로 받아적는 것은 자칫 그 외신의 편향된 관점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바가 될 여지도 있고, 제대로 파악되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 국내 언론사의 관점을 심어 넣는 것은 해당 언론사 기조의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언론사들이 자신들의 사시에 '춘추'를 많이들 인용하곤 한다.  춘추(春秋)는 잘 아시다시피, 중국 편년체 역사서의 효시로, 공자가 노나라 사관이 저작한 역사서에 자신의 글을 적어서 만든 책이다.  왜 춘추라는 이름을 가졌는가? 여러 논의가 있지만, '춘분'과 '추분'의 합성어로 이해하기도 한다.  일년 중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과 같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겠고 그렇게 역사를 쓰겠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춘추에 엄격한 평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실을 견주어 보여줄 수는 있어야 기본은 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같다고 비유할 수는 없겠으나, 함의는 있다.

 

이제는 글로벌 이슈에도 치열하게 여러 생각이 경합하는 보도를 보고 싶다.  국내 이슈에 대해서는 뜨겁게 토론과 참여가 이루어지는 환경에서, 글로벌 이슈에 대해 침묵하게 되는 것이 우리 미디어 환경의 현실이며, 또 대중 문화의 평균이기도 하다.  재미 없기 때문일텐데, 그래서 더 치열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다투고, 싸워야 흥미가 생기고, 한 걸음 더 다가갈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