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생신을 맞아 강원도 집에 간밤에만 잠시 내려왔는데, 마침 유튜브 알고리즘이 오늘은 천상지희 노래들과 무대로 이끌었다. 예전 학창시절의 공간에서 그때 노래들을 들으니 그때의 여러 기억들이 떠오른다. 소리는 역시 기억을 부르는 것 같다. 내일 아침이면 이불킥할 추억에 취해 간밤 중 잡설. 브금은 타이틀곡이라 별로 안 유명하고 빡! 멋있는 노래도 아니지만 라이브를 좋아하는 ‘여우’라는 노래.
20년차 슴덕인 나로서, 가장 잘 갖추어진(명확히 하면, 춤, 노래, 외모와 같은 실력이 거의 삼각형 꼭지점에 있는) 걸그룹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천상지희를 꼽을 것이다. 모두 내가 여전히 덕질하고 있는 걸그룹으로서 진심으로 애정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S.E.S는 멤버 각자의 영역에서 매력이 있는 퍼스트 무버이지만 이들 각자가 명확히 삼각형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소녀시대는 9명 가운데 하나는 원하는 누군가가 있겠지와 같은 전략으로 런칭한 그룹이라는 점에서 천상지희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이후 f(x)부터는 컨셉이 개인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레드벨뱃에서 그 정점을 찍었으며, 아예 개인의 요소를 배제하고 가상세계까지 나아간 것이 현재의 aespa다. (강조하지만, 나는 모두의 덕후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천상지희의 케이팝 시장에서의 성과는 솔직히 열거한 이들 걸그룹에 미치지 못했다. 천상지희는 춤, 노래, 외모 모든 것이 거의 완벽했고, 또 준비되어 있었다. 갖추어진 실력을 바탕으로 부메랑, Dancer in the rain, 여우, the club과 같은 명곡들을 연속적으로 내놓았지만, 슴덕들의 마음만을 울렸을 뿐 대중성을 갖추는 데에는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SM의 경우, 남-녀 그룹을 항상 쌍둥이들로 내놓는다. H.O.T. - S.E.S, 슈퍼주니어-소녀시대, 샤이니-f(x), EXO-레드벨벳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NCT, aespa부터는 살짝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들이 런칭되는 시기는 유사하고, 그에 따라 성별에만 차이가 있을 뿐 컨셉 방향이나 접근 전략도 대동소이하다. 천상지희는 동방신기가 그들의 짝꿍이었다. 천상지희 멤버였던 (천무)스테파니가 라디오스타에서 당시에는 ‘호’를 붙이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언급한바 있는데, 유노윤호, 최강창민, 시아준수, 영웅재중이듯 이곳도 희열다나, 상미린아, 지성선데이, 천무스테파니였다. 역시나 양자 모두 아카펠라(?) 댄스 그룹을 표방했기 때문에, 모든 멤버가 메인 보컬이었고, 춤도 수준급이었다. 그럼에도 동방신기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뒤흔들었지만, 천상지희는 그렇지 못했다.
당연히 천상지희 멤버들의 잘못은 결코 아니다. 슴덕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이유는 지적되고 있다. SM의 푸시가 부족했을 수도 있고, 인기가 치고 오를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에 자꾸 일본으로 보내서 한국 활동에 집중하지 못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SM의 푸시는 대체로 부족하다는 불만이 제기되어 왔고, 결정적인 시기에 쓸 데 없이 해외를 보내거나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평가 역시 다른 그룹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사실 가장 뻔하고 피상적인 분석이 답이 아닌가 싶다. 때가 더럽게도 안 맞았다는 거다. 이 외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천상지희가 데뷔한 해는 2005년이다. Too Good이라는 아카펠라(?) 발라드로 데뷔를 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1세대 아이돌은 저물고 2세대 아이돌이 막 피어오르던 시기였다. 2세대 아이돌의 특징이 있는데, 모두 남성 일색이라는 점이다. 동방신기, SS501, 슈퍼주니어, FT아일랜드, 그리고 빅뱅에 이르기까지.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그리고 2NE1이라는 아예 새로운 2.5세대가 등장하여 자리를 잡기 전까지 여성 아이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천상지희가 경쟁했던 이들은 도대체 누구였는가. ‘소몰이’로 대표되는 워우워 R&B가 케이팝 바닥의 80% 이상은 차지하는 와중에(SG워너비, 버즈 등 굳이 남성 가수들은 언급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고 있으니), 가비앤제이, 브라운아이드걸즈, 씨야와 같은 소위 ‘실력파’ 그룹이거나, 솔로로까지 확장해도 윤하, 아이비, 임정희와 같은 이들이 인정을 받고 있던 시절이다. 천상지희 역시 이러한 시장 상황을 잘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아카펠라(?)와 댄스를 짬뽕한 곡들로 승부수를 던져보려고 했지만, 이것으로 케이팝 바닥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특히 천상지희 데뷔 당시의 걸그룹이라고 하면, 실력을 한수 접고 가는 편견 역시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1세대 아이돌의 성공 이후 케이팝 바닥에서 이름도 모른채 한번 왔다 사라진 걸그룹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어설픈 립싱크 내지는 춤, 그러나 그들만의 매력은 그다지 없다는 편견이 당대 걸그룹에 붙어있는 낙인이었다. 소위 ‘끼어있는 걸그룹’인 천상지희 역시 그들의 춤, 노래, 외모와는 별개로 이러한 낙인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때를 놓치고 나니, 걸그룹으로서의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시대는 변했고, 원더걸스, 소녀시대, 2NE1으로 대표되는 완전히 새로운 걸그룹이 시장을 강타했다. 개별 멤버가 춤, 노래, 외모를 모두 갖추지 않더라도, 컨셉과 기획과 이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결합한 음악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천상지희가 그것을 만들기에는 너무 많은 이미지가 노출되었거나 소진되어버렸다. 그렇게 아까운 SM의 보석들이 숨겨지고 말았다.
이런 덕질 이야기를 굳이 3월 9일에 하는 이유는 오늘이 다 마칠 때쯤이면 어느정도 결론이 내려질 것으로 보이는 대통령 선거와 슬-쩍 비슷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몇 번 후보든 모두 어찌되었건 나름대로 대통령이 되기 위해 가장 잘 갖추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각자들 입장에서는 준비된 후보라고들 생각할 것 같다. 다만, 천상지희 사례에서 보듯 가장 잘 갖추어진 자가 반드시 일등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결과가 나오면, 정당 지지층의 결집이 부족했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고, 결정적인 모멘텀을 놓쳤다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누구보다 절박한 것도 개별 후보들일 것이고, 설득이 되었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자신 또는 그 가족의 어떠한 과거이든 처절하게 다시 리커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점도 모두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선거에서 이기는 후보든 지는 후보든 주어진 상황은 누구에게나 같다.
천상지희가 아쉽게 되어 버린 상황에서 내린 피상적인 결론 만큼, 그 누가 승자가 되더라도 알 수 없는 내일의 결론에 대해서도 동일한 대답이 될 것 같다. 시기의 문제다. 어제까지는 각자의 방법대로 그 시기를 분석하였을 수는 있겠지만, 분석은 각자의 가설이며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이 되어서야 그 분석이 맞았는지 실제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까운 각 진영들의 보석들은 적어도 향후 5년간은 같은 모양새로 숨겨지게 될 것 같다.
천상지희가 데뷔한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미래의 누군가가 2022년 3월 9일을 돌아볼 때 추억하며 아쉬워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만, 누가 되든지 간에 적어도 이들이 불렀던 노래들 (중 가치 있는 부분)의 빛까지 바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소망은 있다. 슴덕 어느 누군가에게 천상지희는 가장 잘 갖추어진 걸그룹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그래도 내가 데뷔시켜보려는 걸그룹이 알고 보니, S.E.S의 I’m Your Girl을 부르고 있거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또는 aespa의 Black Mamba를 부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 아직 누구를 덕질할지 결정하지 못하신 분이 있다면 그래도 마음을 담아보시는 것은 어떠실지.
Disclaimer: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개인적 잡썰 외에 가치있거나 의미있는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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